이들은 일본의 한반도 내정 개입이 조선을 강한 국가로 자립하게 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조선이 완충지대가 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.
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조선이라는 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.
공허한 공유(空儒) 등 못된 선비도 많다고 했다.어지러운 시국을 바로잡을 참선비를 대망했건만 참선비를 발탁하여 국난을 해결할 군주도 없었기에 나라는 끝내 망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.자나 깨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애국심으로 보거나 두 분은 많이 닮은 점이 많다.
이른바 참선비란 조정에 나아가면 한 시대의 도(道)를 행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고.다산과 가장 가까운 인물을 찾다 보면 율곡 이이가 떠오른다.
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5년 세웠다.
바로 진유(眞儒)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.일본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.
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.주로 국내 학자들은 일본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.
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고.강화도 조약과 시모노세키 조약 물론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말 일련의 과정을 보면 실효성이 없다.